현장갤러리

옛 천도교 건물

대전 동구 원동의 공업사골목에 벽돌로 지은 오래 된 건물이 있어 유심히 바라보니 벽돌로 글씨가 선명하게 천도교라고 써 있습니다 아마도 오래전에 천도교에서 지은 건물인가 봅니다 아래에는 낡아 닿아 빠진 페인트로 쓴 오랜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해월관 이라고 써 있는 것이 식당도 있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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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Tehc

등록일2018-08-22

조회수2,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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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본부

| 2018-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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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원관이 아니고 해월회관 입니다
해월회관은 천도교 소유의 건물 이었습니다
6.25때 반공포로 출신 정기준 외 10여명이 논산수용소에 담배 등 여러 물품을 아끼며 여기에서 나오는 돈을 모아 땅을 삿고 이 땅위에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지은 건물입니다

송학

| 2018-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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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수운회관과 대전의 해월회관은 천도교의 상직적건물 이지만 1970년 건물을 지을때 한일은행으로 부터 받은 대출금을 갚지 못해 1974년에 채권은행으로 넘어 갔습니다.
그러니까 천도교의 건물 소유는 불과 몇년 되지 않습니다.
현재는 대전에 거주하는 개인의 소유로 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건물이 매우 낡아 리모델링불가 하고 철거 후 새로 지어야 하지만 주변 환경을 볼때 투자가치가 없으므로 매입에 나서는 사람이 없습니다.

대호

| 2018-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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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는 동학운동 정신이 깃들여져 세운 종교이고 3대 교주인 3.1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손병희 선생에 의해 천도교라는 이름으로 개명되었다

수운회관 안쪽으로 들어가면 빨간 벽돌로 지어진 천도교 중앙대교당이 있다

이 건물을 지을 때는 처음에는 조선총독부 보다 더 크고 위용이 넘치게 지으려 했지만 일제가 허락하지 않는 바람에 규모가 반으로 축소되었다

높고 넓은 건물임에도 건물 안에는 기둥이 하나도 없는 장방형이고 이것은 당시에 일본의 건축기술이 상당히 진보 돼 있음을 알 수 있다

현대 건축 기술이 없던 우리는 일본인에게 건축설계를 맡겼다
하지만 건물의 안에 박달나무 꽃과 무궁화로 민족의 영혼을 담았다

일제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손병희 선생은 나라의 독립을 열망하는 300만 신도들로부터 500만원 그러니까 지금으로 치면 약 2천억원이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모으게 되었다

500만원 중 건축비와 대지 구입비에 36만원을 썼고 나머지 464만원은 독립운동자금에 쓰였다

해방이 되고 귀국한 김구선생은 바로 이곳에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연설을 하였다

천도교가 없었다면 중앙대교당이 없고 중앙대교당이 없었다면 상해 임시정부가 없고 상해 임시정부가 없었다면 대한민국의 독립이 없었을 것이외다!

난다봉숙

| 2018-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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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 손병희 선생의 대해서는 평가가 후불 호로 갈립니다
그가 3일 운동을 주도하였고 우리나라의 독립에 큰 기여를 한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는 롤스로이스 자동차를 끌고 다녔고 여색을 즐기며 아주 호사스럽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때 롤스로이스는 고종황제가 타던 로얄 다이믈러 리무진 보다 더 좋은 차 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나이가 무려 33살 차이나 나는 18세 여성을 세 번째 아내로 들이는 등 그의 행동과 호사스러운 생활에 수많은 비난이 쏟아짐에도 그는 아랑곳 없이 자신의 권세를 마음껏 휘둘렀습니다

빌더킹

| 2018-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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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한국사 스타강사 설민석교수는 민족대표인 손병희는 친일행위가 있었다고 TV에서 강연을 했습니다
역사는 올바라야 합니다
하지만 시대와 관점에 따라 여러 모순을 낳기도 합니다
손병희의 부조리에 일본경찰은 그를 조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은 우리민족의 분열을 원하기 때문 입니다
그래야 그들이 우리의 정치에 깊숙히 개입해 이용해 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오래 전부터 지금까지 우리 사회의 정치 문화 단체 종교 등 일본 정부에 의한 어둠의 손길이 깊숙히 뿌리박혀 있어 지금까지도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모두 밝혀 내야 되고 적폐청산해야 합니다

비다래

| 2018-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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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희선생은 우리나라 최초 룸살롱 태화관에 자주 갔었죠
그러다가 태화관의 마담 주옥경과 사귀고 나중에는 결혼을 하였습니다.
주옥경은 손병희선생과 결혼하기 이전부터 천도교인 이었으며 결혼 후 손병희선생의 내조에만 전념햇다 합니다

후에 이 태화관에서 만해 한용운선생이 민족대표 33인 중 29인과 함께 자리하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게 됩니다

대호

| 2018-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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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옥경 여사는 몸을 파는 기생이 아닌 노래와 그림을 잘 하는 지금으로 따지자면 연예인이었습니다

그의 호는 수의당(守義堂)으로 의암선생을 지킨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녀는 의암 선생이 서대문 형무소에 갇혔을 때 형무소 근처의 낡은 초가집의 월세를 내어 옥바라지를 하였고 의암 선생이 그녀의 나이 28세 때 죽자 평생을 수절하며 1982년에 작고 하셧습니다

사별 후 일본에 유학 한 엘리트로서 일생을 남녀평등을 외치며 여성의 인권에 큰 신장을 한 여성운동가입니다

이는 우리나라 여성운동 역사와 궤를 같이 합니다

네오바로크

| 2018-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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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개업 한 명월관이 당시에는 우리나라 최고의 핫플레이스 였습니다.
지금의 동아일보 자리 입니다

태화관은 명월관의 분점이고 주옥경에사는 산월이라는 기생으로 평양에서 스카우트 되어 태화관에 일하게 되었답니다.

팩트야 어쨋던 주옥경여사는 대한민국 역사에서 여성평등에 큰 기여를 했고 일생을 바친 여인으로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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